어렸을 땐 정말 많이 걸어다녔어요. 고3 시절, 친구와 함께 독서실에 들어가기 전 잠깐만 걷다 들어가자고 나섰다가 2시간 내내 산책만 하고 집에 돌아왔던 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. 거북이 등딱지처럼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도 무거운 줄도 모르고 도착지도 없이 즐겁게 발걸음을 옮겼었지요.
스무 살 초반 무렵에는 동네를 누비며 밤 산책을 그렇게나 많이 했었습니다. 일상의 소소함부터 청춘다운 인생의 고민을 두서없이 나누며 밤새 걸었던 날들을 돌이켜 보노라면, 그 시절의 추억으로 아마 평생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따름입니다. 뭐든지 무던해진 지금과 달리 걷던 그 순간들은 노란빛 가로등처럼 선명하고 반짝거렸네요.
예전에 친구가 '단둘이 술 먹는 것보다 밤 산책이 더 위험하다. 같이 걷자고 하면 백 퍼 감정이 있는 거다.' 라고 해서 깔깔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. 물론 혼자 걷는 것도 좋지만, 편한 사람과 함께 거니는 것만큼 잔잔하게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?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걸을 때 저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평온한 기분을 느낍니다. 정처없이 걷다가 목이 마르면 편의점에서 음료 하나씩을 사서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울 거고요. (일명 <드르륵 칵>이죠)
내일의 일정을 생각하지 않고 걷던 날들이 그립네요. 이 좋은 날들을 함께 만끽하며 걷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언제든 연락해주세요. 조용한 골목길도 좋고, 물비린내 나는 강변도 좋아요. 그럼 다음 편지에서 만나요. 안녕!
당신의 친구, Hai